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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유게시판] 은실이, 입을 열다
조회 86
회원이미지김은형
2008-03-24 18:24:53
 


이천 팔년 삼월 십칠일 목요일


은실이, 입을 열다


 아이들이 거북이라면, 은실이는 아주 작은 달팽이다. 그것도 아주 작게 움츠러들어 있는 달팽이. 은실이는 실어증 환자처럼 절대로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작년 한 해 동안 은실이가 내는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이름을 부르면 쳐다보고,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지만, 소리는 내지 않는다. 아주 가끔은 웃는 듯 한 표정도 짓지만, 그 애가 웃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래서 은실이는 존재감이 없다. 은실이는 두레활동을 할 때도 자기 자리에 앉아 있거나 내 강요에 못 이겨 모이더라도 귀퉁이에 투명인간처럼 그렇게 앉아 있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나도 언젠가부터는 은실이를 수업에 동참시키겠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3학년 올라와서 첫 말하기 수업 때, 마지막까지 공책제목 소개와 자기소개를 하지 않은 은실이에게 의례적으로 발표를 권했을 뿐이다. 앞으로 나오라고 했지만 예상대로 은실이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때 친구들이 은실이에게 용기를 내라며 격려를 하자 은실이가 자리에서 간신히 일어섰다. 그러나 은실인는 그 뿐 앞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나는 안나와도 좋으니 그 자리에서 ‘공책 제목’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들은 은실이의 공책을 손에 들려주며 힘을 더 불어 넣었다.

“은실아, 어서!”

 은실이는 멋쩍은 듯, 공책 이름을 불렀다. 무슨 소린지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은실이 입에서 무언가 소리가 나왔다는 것이 신기해 나는 얼른 칭찬부터 했다.

“옳지, 우리 은실이가 드디어 발표를 하는구나!”

 우리는 은실이를 위해 손뼉을 쳐주었다. 그러나 그 뿐, 나는 더 이상 발전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아이들 말로는 은실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렇게 지냈는데, 아이들이 놀리고 때리기도 해서 학교에 자주 결석했었다고 한다. 중학교1,2학년 때도 천식, 장염 등 건강도 좋지 않아 조퇴, 결석이 많았다. 


 그런데 은실이가 류시화 시두레 아이들과 함께 앞에 나와 시를 낭송했다. 그건 기적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나란히 서 있는 은실이를 보면서도 그 애가 시를 낭송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류시화 시 두레 아이들은 1반에서 아주 특이한 아이들만 모여 있었다. 선생님을 욕한 죄로 쫒겨다니던 소희, 반항적이고 수업에 관삼 없는 예진이, 만화에나 나올 듯한 소심한 왕따 상학이, 큰 등치에 늘 책상에 엎드려 있는 그늘진 소영이, 말 모하는 지체장애 주영이, 그리고 은실이다. 요즘 학교에도 잘 나오지 않고, 우울증에 걸린듯한 소영이가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암송한 것도 대단히 놀라운 일이고, 예진이가 ‘눈물’을 암송 한 것 또한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 아이들이 한 편의 시를 인내심을 갖고 암송해서 음악을 배경으로 낭송한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무리 다른 아이들의 시낭송도 놀랍긴 하지만, 은실이하고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마지막에 은실이 차례가 왔을 때 아이들은 은실이의 시 공책을 들어 올리며 따뜻하게 은실이를 격려한다.

 “은실아, 어서.”

 그러자 은실이가 망설이다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는 큰 소리였다. 하지만, 발음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은실이에게는 발음장애가 있음을 알았다. 은실이가 말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 구강 장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귀를 쫑긋 세웠다. 


         물안개


                                              류시화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 후 어떻게 되었냐고.....

 물안개처럼

 몇 겁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나는 은실이의 시를 다시 한 번 낭송해 주었다.


 은실이가 입을 열다니! 새로운 혁명이라도 일어난 듯, 나의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이건 나의 힘이 아니다. 친구들의 힘이다. 장난꾸러니 재황이의 리드가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그러나 진짜 힘은 장애아인 현우와 주영이, 그리고 소영이, 소희, 경묵이,상학이, 예진이 들의 힘이다. 부족한 친구들의 진짜 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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